조혜은, 발음되지 않는 엽서

몇장의 우리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숨쉬지 않는 모니터 같은 얼굴로
속이 깊은 겨울을 가진 내밀한 연인들처럼

학습지도실
이렇게 간단한 사칙연산에도 오류를 가지는 건 어린애들이나 하는 짓이야
엄마는 내 눈을 감기고 부레에 출혈이 있는 물고기처럼 두 귀를 틀어 막았다
오르락내리락 운동장을 헤매며, 나는

언젠가는 모두가 나를 더 싫어할 거야. 좋아하라는 부탁을 한 적도 없었는데

너와 내가 바뀌고 잘못 발음되고. 아빠가 생략되고, 나쁜 엄마가 조금 더 나빠져야만 하는 나의 입 속에서. 나는 자꾸만 바뀌어 발음되는 것들. 사랑은 아 더하기 너

12월 24일
아름다운 입천장을 가진 트리에 매달려 있었다

그 문장에 조금 더 오래 머물러 있고 싶어요

너와 네가 있는 학습지도실
너는 네게 말했다. 너를 이해할 수 없어, 네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겠어. 너는 나를 사랑한다는 거니, 그렇지 않다는 거니

이해할 수 없는 너에게로 동화되는 나, 너는 사랑한다. 나는 그렇지 않다. 하지만 나는 발음할 수 없는 나. 선생님 우리는 어떻게 발음해야 하죠? 이 말과 저 말 사이의 투명한 날씨와 목 뒤로 부풀어 오르는 꿈들. 너에게로 순행하는 나. 너는 사랑한다. 사랑은 그렇지 않다

너는 내게 말했다. 사랑은 아 더하기 너

방과후 학습지도실
이건 결코 어려운 문제가 아니야
<눈처럼 하얀 아기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조금 더 웃거나, 조금 덜 울면 풀 수 있어

엄마는 나를 사랑하는 걸까, 그렇지 않은 걸까

장난감이 'ㄴ'을 잃어버리고 연필이 받침을 바꿔들고, 할머니가 할아버지도 되고 아버지가 바지도 되는 나의 입 속에서, 나는 너를 잃어버리고, 긴장한 나는 사랑을 싸움이라 말한다

오늘도 발음할 수 없는 나. 이해할 수 없는 너. 하지만 사랑은 가장 낮은 혀를 가진 자들의 마찰. 어느 말끔한 겨울의 한낮처럼 눈부신 우리가 좋아. 나는 손가락으로 혀를 누르고 '아'하고 소리를 질렀다

12월 23일
너는 내게 말했다. 가까이 다가서서 어른들의 발음을 훔쳐내기 시작해

치아처럼 고운 눈이 내렸다

학습지도실
몇장의 우리가 바닥에 찢어져 있었다

너의 문제는 멀리서 반짝이는 뇌의 어떤 영역. 그건 나와는 달랐고 세련된 이름을 가졌고. 너는 그것들을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기꺼이 근사하게 발음할 수 있었다. 너는 그 속에 나의 손을 넣고 병든 문장을 휘젓고 다시 배열하기를 반복했다.

오래된 하드보드지같이 오늘은 우리가 좀 씩씩해 보이지 않니?

고통을 참으며 네가 말했다. 잔뜩 눌린 채 가장 어려운 7번 문항을 풀 때처럼, 장애라는 말을 구겨놓고 잔뜩 찡그린 채로
너는 학습지도실을 떠났다

너에게서 역행하는 나
너는 그렇지 않다, 나는 또 그렇지 않다

나의 파열된 입 속에는 네가 결코 잊어서는 안될 뇌의 어떤 영역이, 깊은 호흡을 꿈꾸고. 멈춰서 있었다.

방과후 학습지도실
<내가 공기를 들이마시고 성대를 진동시키는 건 네가 있는 영역에 전달되고 싶기 때문이야>
어느날엔가는 꼭 봉투에 담아 보내고 싶은 내 입 속의 키스

<학습지도실은 나에 대한 너의 배열 방식>
책상 위에 엎드리자 네가 남기고 간 문장들도 모두 잠든 척했다

12월 25일
싼타할아버지는 나의 턱에 변별할 수 있는 발음들을 넣어주었지만
나의 문제는 여전히 입 속에 있었고,
너는 내가 발음할 수 없는 그대로

우리는 우리를 닮은 그대로, 미숙한 이 문장에 계속 머물러 있고 싶어요

너와 내가 있는 학습지도실
어느 말끔한 겨울의 한낮처럼 눈부신 <우리>가 좋아